감사하는 마음

Author
회개와 복음 회개와 복음
Date
2019-04-2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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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요,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근본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그의 백성에게 바라시는 근원적인 감사, 곧 아무 수확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환경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이를 잘 표현한 말씀이 하박국 3:17-18의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근원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이 최상의 감사를 저는 찬미의 제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찬미는 감사에다가 기쁨을 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신 말씀을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편안할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입술로 드리는 ‘찬미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 나오는 찬양은 우리의 육신과 생각의 처지를 넘어서는 영혼의 감사가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여 있었어도 밤중에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조건적인 정신적 감사가 아닙니다. 이는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 그들의 마음 깊은 곳, 영혼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표현이 찬미로 나타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후.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가 제자의 손에 팔려 유대인과 로마인에게 내어준 바 되고, 십자가의 형벌로 죽음을 당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아직 육체의 고통은 당하시기 전이었으나, 그 심적 고통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배신의 고통과 닥쳐 올 고난에 대한 중압감은 인간으로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고, 더욱이 기뻐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감사에다가 기쁨을 더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감람산의 서쪽 겟세마네 동산에는 이미 그를 잡으러 올 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이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의 극치였다면, 겟세마네는 예수님의 심적 고통의 극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으로 나아가면서 그는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히 13:15)를 드린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광에 이르는 소망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된 감사와 기쁨의 제사는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극한 심적 고난과 시련의 형편과 처지에서 드리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진정한 믿음의 고백과 감사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감사할 수 없는 시련의 순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난 중에서 감사하고 그로 인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축복을 미리 감사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결단은 평화롭고 모든 것이 보장된 삶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네로의 핍박으로 잡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인간이었기에 원형경기장에 이끌려 나가기 전까지 닥쳐올 시련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심적으로 말할 수 없이 괴로움을 겪었으나, 사자에게 물어 뜯기는 육신의 고통은 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찬미하며 하늘의 기쁨을 미리 맛보면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나라에 갔던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드린 찬미는 마취제보다 강한 하나님의 영광에 취해 육신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영혼의 기쁨의 노래가 되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기장에서 그들의 죽은 모습은 한결같이 웃고 평화로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려운 순간이 신앙 안에서 믿음으로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가 나오지 못할 처지가 근원적이고도 진정한 감사를 발견하고 고백할 순간이 됨을 믿읍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신앙은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비상할 수 있고,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욥이 고난 중에 고백한 대로 하나님께서 앞에도 계시지 않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으며 왼편에서도 만날 수 없고 오른편으로 돌이켜도 볼 수 없더라도 우리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지금이 감사와 찬미를 고백할 최적기요, 우리의 신앙이 도약할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시편 42편의 저자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고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지만 낮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있고 밤에는 찬송이 내게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자신에게 외치기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11절)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에 대한 고상한 생각, 그 동안의 우리 성경지식, 또한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형편을 돕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시련의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믿음을 입술로 고백할 때요,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를 드릴 행동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습니다(마 19:26)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가 올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고서도,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찬미할 때 죽음의 고난이 부활의 영광으로 바뀌고, 멸망과 저주의 십자가가 구원과 축복의 능력이 됩니다.

 

오늘도 감사에 기쁨을 더하여 찬미합시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닥친 시련은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낳기 때문입니다.